[프레스나인] 조선 초기 세종대왕은 궁궐 안에 연구기관 ‘집현전’을 설치했다. 집현전은 학문 연구, 인재 양성, 왕실의 자문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조선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국내 대표적 바이오기업인 HLB그룹도 2021년부터 ‘바이오 집현전’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룹 내 제약바이오 인재들이 모인 동탄 통합연구소가 바로 그곳이다.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동탄연구소는 오늘도 ‘휴먼 라이프 베터(Human Life Better)’ 비전의 심장으로서 힘차게 맥동하고 있다.
◆첨단 기술 시험대, ‘함께하는 혁신’ 무대
“동탄연구소에서는 전임상 단계의 실험이 모두 가능합니다. 세포 레벨의 테스트는 물론 동물실험도 전부 진행하죠. 설비는 입주기업들이 공유합니다.”
12일 국내 언론사 최초로 HLB그룹 동탄 통합연구소를 찾았다. 그룹 전체의 바이오 연구개발(R&D)을 진두지휘하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곳답게 규모가 작지 않았다. 전체 크기는 672.4㎡(505평), 상주 인력만 60여명에 달한다.
깔끔한 복도 좌우로 세포배양실, RNA분석실, 화학분석실, 단백질분석실, 동물실험실을 비롯한 첨단 연구시설이 늘어서 있었다. 그 중 한 곳으로 발을 들였다. 새하얀 가운을 걸친 연구원들이 복잡한 기기를 다루며 실험 중이었다. 곳곳에 놓인 유리 용기에는 뿌연 액체가 담겼다.

안내에 나선 고두영 HLB제약 DDS팀장은 HLB제약이 개발한 장기지속형 주사제의 품질에 대한 테스트를 진행하는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약물을 감싼 미립구들이 무수히 모여 있어서 뿌옇게 보이는 겁니다. 미립구는 아주 작은 알갱이인데, 흠 없이 균일하게 생산돼야 약물을 일정하게 방출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스크린에 약물을 확대한 사진을 띄웠다. 촘촘하게 모인 둥근 알갱이들이 마치 빵틀에서 찍어낸 것 같았다. 하나하나가 마이크로미터 단위 크기로, 머리카락 두께보다 훨씬 미세하다. 이 알갱이들이 체내에 투여되면 내부의 약물을 서서히 방출하면서 오랫동안 약효가 지속되게 하는 것이다.
“현재는 장기지속형 주사제를 제조하는 양을 조금씩 늘려가며 일정한 품질이 유지되는지 확인하고 있습니다. 실험실 레벨에서 재현성 테스트가 완료되면 이후 GMP 시설로 옮겨서 다시 테스트를 하게 됩니다. 앞서 개발한 아픽사반 주사제의 경우 이미 스케일업 전후의 재현성을 확인한 상태죠.”
현재 HLB제약은 비만 치료제인 GLP-1 제제를 장기지속형 주사제로 개발하는 중이다. 그래서인지 연구소 한쪽에 위치한 동물실험실 앞에는 동물실험 일정이 빼곡하게 기록돼 있었다. 주로 비만, 당뇨 등에 대한 랫 모델의 실험이 이뤄지는 중이라고 했다.
다른 기업이 어떤 일을 하는지도 궁금했다. 동탄연구소에는 HLB생명과학, HLB제약, HLB셀, HLB사이언스 등 HLB그룹 바이오 계열사 4곳이 입주해 있다. 다만 이들이 운영하는 시설 대부분은 외부인 출입이 제한돼 직접 살펴보기는 어려웠다.
다행히 HLB셀의 윤희훈 연구소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HLB셀은 인간 유래 세포외기질(세포를 지지하고 연결하는 물질) ‘휴트리겔’, 차세대 분말형 지혈제 ‘블리드픽스’, 바이오 인공간, 의료용 플라스틱 등을 개발하는 업체다.

윤 소장은 동탄연구소가 HLB그룹 바이오 계열사들의 교집합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여러 전문가가 한 자리에서 머리를 맞대다 보니 자연히 서로의 지식을 활용한 아이디어가 샘솟는다고.
실제 협업 사례가 있냐고 묻자 HLB셀과 HLB제약의 파트너십이 진행되고 있다고 귀띔했다. 휴트리겔에 HLB제약의 히알루론산 필러 기술을 더해 피부재생 효과가 있는 필러를 선보이겠다는 것.
“히알루론산 필러는 친수성이어서 주변 조직과 잘 안 붙는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체내에서 분해되면 주름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기도 하죠. 그런데 휴트리겔을 같이 쓰면 히알루론산이 분해돼도 주변 섬유화세포가 잘 들어와서 실제 조직으로 바뀌는 데 도움을 줍니다. 현재 허가 목적의 비임상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공개되지 않은 수많은 협업 프로젝트가 동탄연구소를 배경으로 추진되는 중이다. 백조의 물장구가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듯, 동탄연구소 역시 커튼 뒤에서 조용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셈이다.
◆“좋은 기술은 같이 쓰자”, ‘휴먼 라이프 베터’ 위한 토론 현장
1+1로 3, 혹은 그 이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HLB그룹 동탄연구소의 일상이다. 마침 이날 동탄연구소에서 열린 R&D 전략회의를 통해 그런 노력의 일면을 엿볼 수 있었다.
매달 1회 열리는 전략회의에는 한용해 HLB그룹 CTO와 동탄연구소 입주기업 연구진이 참석한다. HLB뉴로토브, HLB테라퓨틱스, HLB제넥스 등 최근 합류한 바이오 계열사의 인원들은 줌(ZOOM)을 통해 얼굴을 비췄다. 이들 기업은 HLB그룹 내에서도 ‘R&D 그룹’으로 따로 묶인다.
첫 주제는 HLB제약 장기지속형 주사제 기술 ‘SMEB’의 활용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HLB제약 발표자로 나선 정두용 연구본부장은 SMEB이 타사 기술 대비 여러 측면에서 우위에 있다고 강조했다. 줌으로 공유되는 화면에는 정 본부장의 설명을 뒷받침하는 각종 수치가 떠올랐다.

“우리 제형기술은 대단히 정교합니다. 균일한 미립구만 만드는게 아니라 약물 분포나 약물 용출 속도 조절에 굉장한 강점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노하우를 다른 계열사 물질에 적용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자 다른 연구진이 손을 들었다. 약물을 담는 미립구 크기는 어느 정도로 만들 수 있는지, 장기지속형 제제의 생산성은 어느 정도인지를 물었다. 한용해 CTO도 적극적으로 문답을 나눴다.
대화는 길어졌다. 전문가라 해도 다른 영역의 기술에 대해 모두 알지는 못하다 보니 의견 교환이 필수다. HLB그룹이 커지면서 이런 정보 교류의 장은 더더욱 중요해졌다. 그룹이 새로 확보한 기술과 물질이 기존 계열사의 것과 합쳐졌을 때 어떤 효과를 내는지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HLB그룹에 최근 합류한 HLB펩은 새로운 GLP-1 제제를 보유하고 있는데, HLB제약의 장기지속형 주사제 기술과 궁합이 좋은 것으로 전해진다. 차세대 파이프라인으로 성장할 잠재성을 갖췄다는 평가가 나온다.
연구소에 직접 들어오지 않은 기업들도 서로 적극적으로 교류하기는 마찬가지다. 한 CTO는 “해외 자회사를 포함해 입주하지 않은 회사들은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지만 매달 프로젝트를 공유하고 업데이트한다”며 “전문가끼리 묶어서 운영하며 효율이 개선됐다”고 전했다.